사실, 내가 살아보려고 시도한 노력은 '나'라는 인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려는 결심에 의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고뇌의 독백으로 시작되어 마침내 '그 사내를 닮은' 깨달음으로 끝납니다. 소설의 저자 헤르만 헤세의 어머니는 그의 아들 헤세를 가리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아이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력 그리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친의 말처럼 헤르만 헤세는 정의와 이념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생각한 작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작품들은 고뇌 속 방황하는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19년 출판된 소설 <데미안> 역시 헤세의 깊은 성찰과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데미안> 줄거리
주인공 싱클레어는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의 공존 가운데 있습니다. 자애로운 부모님과 정다운 가족에서 비롯된 평화롭고 따듯한 밝은 세계, 외부세계에서 비롯된 혼돈과 암울한 어두운 세계. 그러던 중, 싱클레어는 같은 학교의 불량배인 프란츠 크로머에게 협박과 괴롭힘을 당합니다. 따듯하고 밝은 세계였던 싱클레어는 점차 암울하고 어두운 세계에 잠식됩니다.
내 주위에서 밝은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세계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던 싱클레어에게 그를 도와줄 인물 막스 데미안이 등장합니다. 막스 데이만은 같은 학교 학생입니다. 데미안은 여러 소문의 중심이기도 하면서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오묘한 학생입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미안은 프란츠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못하게 도와줍니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원래 속해있던 밝은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성경 속 인물 중 하나인 '카인'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던 기존 가치에 대해 큰 충격을 던집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라고 했다.
데미안의 세계는 밝은 세계도 아닌, 어두운 세계도 아닌 그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가까워질수록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졸업 이후 김나지움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데미안과 멀어지게 됩니다. 알폰스 베크라는 술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어두운 세계에 빠지게 되고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며 끝없는 고독과 방황, 자기갈등을 겪습니다. 싱클레어는 동경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이 그린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데미안 혹은 싱클레어 자신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다시 데미안을 생각하며 필요로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그 초상화의 얼굴은 데미안도 아니고 베아트리체도 아니고 나 자신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싱클레어는 길에서 우연히 데미안을 만나게 됩니다. 데미안은 자신의 어머니 에바부인을 싱클레어에게 소개시켜주고 싱클레어는 에바부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전쟁이 터지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전쟁에 참여합니다. 전쟁터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쓰러진 싱클레어는 자기 옆에 데미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앞으로 싱클레어는 자신을 만나지 못할 것이며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나 데미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정신이 든 싱클레어는 자신의 얼굴이 데미안의 모습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내 친구이며 내 인도자인 그 사나이를 닮아 있었다.
<데미안> 서평
소설 <데미안>의 첫 시작은 싱클레어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만큼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내적 고민과 내적 성장기를 보여줍니다. 싱클레어는 궁극적인 '자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고뇌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저자 헤르만 헤세는 삶 자체를 '나'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설정하면서 싱클레어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유의 '나'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고유의 '나'가 존재하는 특별하고도 다른 사람과 구별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싱클레어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은 어쩌면 환상의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싱클레어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 구해주고, 고민에 빠져 있어 데미안을 필요로 할 때 등장하며, 싱클레어가 그리는 그림이나 꿈에 상징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소설 <데미안>은 싱클레어 혼자 등장하는 소설이었던 것이죠.
'나'를 알기 위한 고민의 길에 이정표가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입니다. 자신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외부가 정해준 이정표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고민과 고뇌는 자신의 소리에 따라 움직이게 만듭니다. 결정의 순간에, 선택의 기로에 매번 싱클레어 내면의 소리 즉, '데미안'은 속삭입니다. 기존 가치의 전도를 일으켜라, 스스로 생각해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라, 그 알을 깨고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가라.
인간의 생애란 각자가 자기 자신이 지향한 바에 도달하기 위한 길.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인 것이다.
<인간실격> 주인공 요조와 비교하며
<데미안>을 읽으면서,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대화를 통해 한 단계씩 그가 성장해 나갈때마다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를 가여워했을 인물.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입니다.
요조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가리켜 '부끄럼 많은 생애'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에 불안해했고 남이 가진 괴로움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한 모순 덩어리인 세상이 두려워 익살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자신을 '무(無)'로 만들어버린 인물입니다.
인간실격, 이제 저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인간실력
<데미안>과 <인간실격> 두 소설은 많이 닮아있습니다. 주인공 모두 삶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 두 세계의 공존 가운데 살았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인간실격> 의 주인공 요조 또한 싱클레어만큼이나 자신의 생애와 타인의 삶, 세상에 대한 고민이 깊은 인물입니다. 싱클레어가 그러한 성장기를 거쳤듯이 요조 역시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간의 괴리감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공통점으로 시작한 두 인물의 고민의 끝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요조는 '나'에 대한 고민을 '남'에 대해 알아감으로써 확인하려한 반면에 싱클레어는 '나'에 대한 고민을 '나'에 대해 알아감으로써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책의 마지막 요조는 끝내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피폐한 인생으로 끝나지만 싱클레어는 자신의 이상향과 자아상을 확립한 인생으로 피어납니다. 두 인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하여 나는 머리를 조금씩 높이 쳐들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세계라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맹조가 알에서 깬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세상을 이기거나 세상에 날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힘을 가해 내면의 힘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새가 살아남기 위해 편안하고 안정된 알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힘을 가해 알을 깨고 나와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게 지탱해주는 힘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곧 된다는 것입니다. 된다는 것은 이전의 나를 딛어야만 가능합니다. 딛는 만큼 더 높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요. 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가능한 성장입니다. 요조는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립니다. 비록 그것이 요조의 선한 성품과 이타성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요조는 스스로 서있는 법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서 고민하며 혼란과 혼돈 속에서도 기꺼이 혼돈을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외부의 소리는 낮추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합니다. 요조는 자기에의 연민, 타인에게 보인 이타성, 그로부터 온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알을 깨지 못합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 인간실격
한 인물의 내적 성장기를 다룬 소설 <데미안>. 소설의 제목이 주인공 이름이 아닌 데미안이 된 까닭은 싱클레어가 곧 데미안이며 싱클레어의 궁극적 자아상이 바로 데미안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설의 첫 부분 싱클레어가 독백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나를 찾는 이야기이자 나로 시작되어 나로 돌아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다. 알에서 빠져 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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