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소설 <연금술사>는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 이상이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연금술사라는 신비하고도 오묘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으로 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연금술에는 그것을 '만물의 정기'라고 부르지. 사람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랄 때 만물의 정기에 가까워지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힘이지.
사실, 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 전반에는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 '현실을 깨고 꿈을 찾아라' 등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굉장히 흔하고 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흔하고 뻔한 주제가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을까요? 어떤 매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저는 그 대답 중 하나가 <연금술사>의 서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서론에는 나르키소스 신화를 각색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나르키소스 신화는 호수에 비친 자기 자신을 사랑해 버린 나르키소스가 결국 호수에 빠져 죽게 된 이야기입니다. 나르시시즘의 유래이기도 한 신화입니다. 소설 서론에는 나르키소스의 죽음 이후의 상황이 전개됩니다. 호수가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슬퍼하자 사람들은 호수가 더 이상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호수는 말합니다. 나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의 눈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는데 이제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연금술사>가 하나의 주제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풀어가는지 이 서론에서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제 그럴 수 없잖아요.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vs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멘 헤세의 <데미안>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애란 각자가 자기 자신이 지향한 바에 도달하기 위한 길,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인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동일한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얘기합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말을 빌리자면 '자아의 신화'가 곧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즉, 인간의 생애란, 인간의 길이란, 인간의 꿈이란, 인간의 목표란 단 하나의 무엇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 모든 경험의 집합이듯 내가 겪어온 과정과 길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갑니다. 내가 지표를 쫓아 행동하는 모든 순간들은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하나의 길인 것입니다.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 "그 알은 새의 세계다. 알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연금술사>의 주제와 맥을 같이합니다.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의 조언자이자 영적 존재처럼 나오는 멜기세덱은 꿈을 가지고 있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산티아고에게 가지고 있던 양을 모두 팔고 피라미드를 향해 나아가라고 조언합니다. 직업이 양치기인 산티아고에게 양이란 그의 모든 것입니다. 그의 직업이자 가정이자 안정이자 사랑입니다. 그 안전하고도 안정된 구역에서 빠져나가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조언입니다. 이것은 기존 자신의 생각, 성격, 성품, 가치관 모두를 넘어서는 일처럼 보입니다. 새가 날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알을 파괴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갈 때 비로소 외부의 소리가 아닌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떠나지 못하게 그를 막을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 말고는.
소극적인 숙명론 vs 적극적인 운명론
산티아고가 피라미드를 향해 나아가며 자아의 신화를 쫓아갈 때 그는 만물의 언어를 배웁니다. 만물의 언어는 결국 내면의 소리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산티아고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깨닫게 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산티아고가 자기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시작됩니다. 산티아고 주변 도처에 놓여있던 표지를 발견하고 놓치지 않고 움켜쥐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표지는 수동적인 상징물이 아닌 것입니다. 지나가는 행운처럼 나에게 오면 좋은것, 비켜가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내가 반드시 발견하고 움켜쥐는 것, 보고 끝까지 쫓아가는 것,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표지가 그랬던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나의 표지는 아니었던 거야라고 말하는 소극적인 숙명론이 아닙니다. 표지를 내 것을 만들어서 내가 이용하는 것, 표지를 있는 그대로 허용하여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성장의 기회로 사용하는 것,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나의 길에 이정표로 꽂아 나중에 길을 잃어도 이정표를 보고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운명론입니다.
나를 알아가는 동시에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는 동시에 주변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내게 주어진 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연금술사가 산티아고에게 속삭였던 것처럼 내 인생의 끝날 어떤 절대자가 내게 와 "어땠나? 아름답지 않던가?"라고 물어봤을 때 참 아름다웠다고 확신하며 말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미리 일러 주었더라면 그대는 정녕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리니. 어땠나? 아름답지 않던가?
철학자 니체는 그의 서적 유고에서 말합니다. "모든 삶의 순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표지를 보고 이해하고 움켜쥐며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현재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래를 향하는 길 위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표지를 봤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움켜쥐지 않아 결국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게 만드는 사람은 현상 유지의 의지 속에 살아갑니다. <연금술사> 속 크리스탈 그릇 가게 주인이나 팝콘 장수가 그러했던 것처럼요.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얼마나 자비로운지 새삼 신의 뜻에 고개가 숙여졌다.
"어땠나? 아름답지 않던가" 라고 말하는 연금술사의 물음은 우리의 인생 끝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최후의 질문 같았습니다. 만일 그 절대자가 우리의 삶과 죽음, 처음과 끝을 모두 말해주었더라면 우리는 이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해 나는 정말 내 삶에 충실했고 그래서 내 삶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은 아마도 인간이 야자나무숲을 보고 기뻐하게 할 요량으로 사막을 만드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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