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달이 될 누군가에게, 또 누군가에게는 달이 될 당신에게
▣ 따듯한 문장을 담은 시집 <달을 닮은 너에게>
그런 음악이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그 순간'이 떠오르는 음악. 일상에 덮여 숨겨있던 나만의 '그 순간'. 음악이 끝날 때 쯤이면 '그 순간'의 하루를 다시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 날에 맡았던 향, 보았던 모습, 느꼈던 감정이 마치 지금인 듯 오감으로 느끼게 됩니다. 오밤 이정현의 시집 <달을 닮은 너에게>는 우리의 '그 순간'을 끄집어냅니다.
이 시집은 우연히 집 앞 도서관에 갔다가 눈길에 끌려 그 자리에서 읽어봤던 시집입니다. 몇 장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빌려왔고 집에 와서 읽다가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구매를 결정한 책이기도 합니다.
수록되어 있는 시들이 정말 좋아서 작가를 찾아봤는데 작가분이 남자라는 사실에 놀랐던 시집이기도 합니다. 시와 문장이 너무 따듯하고 예쁘기도 했고 이름이 주는 느낌때문에 사실 여성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는 SNS에서 '오밤'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현 작가입니다. 매일 쓰던 일기를 다른 방식으로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글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 했습니다. 감정이 문장으로 표현된 시입니다.
특히 이 시집은 '사랑해'라는 단어를 천 가지 언어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방법이 왜곡되어 굽어진 표현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데 시에서의 사랑은 굽어짐 없는 둥근 사랑입니다. 마치 네가 내 곁에서 두 발걸음 물러난 사랑이라면 난 그 두 발걸음의 간격을 날마다 쓸고 닦으며 기다리는 사랑 같기도 합니다.
저의 느낌과 후기보다 직접 읽으면 좋을 시집으로 보여서 제가 읽고 좋았던 몇 페이지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 <달을 닮은 너에게> 시 소개
달이 희미하면 바다도 어둡고
달이 밝으면 바다도 빛난다
달이 밀면 바다는 밀리고
달이 당기면 바다는 다가간다
바다는 달을 담고 산다
평생을 비추어 내면
혹여 저에게 빠져줄까 하고
- 달과 바다
노을은 지는 해의 설움인가 오는 달의 설렘인가
둘의 이별은 만남이 없기에 하루를 거르지 않고 아름답다
- 노을
그 많은 것들 중 너는 왜 하필 꽃이어서,
걷던 나를 멈추게 해 너만 바라보게 만들어
그 많은 꽃들 중 그레 왜 하필 너여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너만 쓰다듬게 만들어
- 꽃
비스듬히 걸친 태도에서는
비스듬히 걸친 마음 밖에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다
너는 물 잔을 내어주고
바다를 담으려 하는가
- 오만
공중에 그네를 걸었다
한 쪽은 너를 보고 싶은 마음에 걸고
한 쪽은 너를 미워하는 마음에 걸면
그 균형이 꼭 맞았다
밀어줄 사람은 한쪽 줄을 걸고서
지친다고 가버린 지 한참인데
남은 사람은 밀어줄 사람도 없이
그 한참을 흔들리고 앉았다
- 그네
내 모든 양분을 네게 주며 살랑이던 꽃잎에 흐뭇해하던
나는, 가냘픈 연질의 줄기였다
행여 피워낸 첫 꽃잎이 마를까 나의 잎사귀는 안중에도 없던
나는, 서글픈 연질의 사랑이었다
흩어진 네가 떠나며 남긴 낙화의 슬픔을 내게 쏟았더니
나는, 곧게 솟은 나무가 되었다
꽃에 흔들리는 여린 줄기가 아닌 단단한 밑둥으로 꽃을 보듬어 주는
나는,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 꽃을 피우는 나무
나와 너 다음에 밑줄 하나를 그어 뒀더니
내가 아는 대부분의 단어가 그 선을 밟고 지났다
그런데도 제자리라며 멈춰 서는 단어 하나가 없다
어쩌면 하나의 문장조차 될 수 없었던 걸까
그래서,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나
- 나는 너에게
자주 지나던 곳 가로등 아래
청중이라고는 별 두어 개
나는 저울 없는 사회자였고
규칙 없는 토론자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꺼트린 가로등이
우리가 걸었던 밤만큼 깜빡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밤에 대해서 발언권이 없다
- 달도 숨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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