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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도서 리뷰]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이타성에 의해 자멸한 사나이

by 제이네스(Jness)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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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당신은 요조를 알고 있던가요?

 

▣ 소설 <인간실격>, 작가 "다자이 오사무"

 
소설 <인간실격>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유서로 불리는 책입니다. 서른아홉의 나이로 생을 스스로 마감했던 다자이 오사무가 그가 했던 고민, 생각, 고뇌를 있는 그대로 소설 속 주인공에게 투영했기 때문입니다.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 이름은 "요조"입니다. 작가는 말하지 않지만 소설 속 요조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요조의 말이 아니라 책에 갇혀버린, 삶에 갇혀버린 작가의 처절한 마지막 외침처럼 들리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 소설 <인간실격> 주인공 : 요조

 
소설의 첫 시작은 세장의 사진과 세 편의 수기로 시작합니다. 세장의 사진, 세 편의 수기의 주인공은 "요조"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애 주기를 총 6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영. 유아기 - 아동기 - 청소년기 - 성년기 - 중년기 - 노년기]
인간의 탄생부터 사망까지 기간을 위와 같이 6단계로 구분합니다. 마치 인간의 생애 주기와 같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진과 수기는 요조의 성장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소설에서 설명되는 요조의 생애 주기 단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6단계가 아닌 3가지 단계뿐입니다. 마치 요조의 어떤 성장과정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느낌입니다. 
[익살을 배운 아동기 - 자살을 시도한 청소년기 - 의미를 상실한 성년기]
단 3단계만이 요조를 설명합니다. 소개된 세 장의 사진 중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사진에서 요조는 '웃고'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보고 있는 소설 속 제삼자는 요조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장 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표정의 소년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학생한테서도 역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상한 미남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세 장의 사진 중 마지막 장인 성년 요조는 이제 '웃고'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삼자는 다시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아,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인상조차 없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그저 무턱대고 역겹고 짜증 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어 진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묘한 얼굴의 남자를 역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분명 소설 속 첫 문장은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 석장 본 적이 있다.'라고 서술하면서 한 사람의 사진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세 장의 사진은 마치 각기 다른 사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진 속 인물의 공통점이라고는 '괴상', '이상', '기묘'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어 왜 세 장의 사진이 각기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지,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지 세 편의 수기를 통해 설명합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 소설 <인간실격> 줄거리

주인공 요조는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일로 바빠 어린 요조는 하인과 시녀, 형제들에 의해 자라게 됩니다. 요조는 똑똑하고 영특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요조는 평범함을 선택합니다. 요조는 타인의 감정과 기분에 민감했습니다. 타인의 감정과 기분이 안 좋아지면 요조도 금세 불행해졌고 타인의 감정과 기분이 좋아지면 요조도 순식간에 행복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요조가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처세술은 "익살"입니다.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무엇이 갖고 싶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사자탈"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것은 요조의 당연한 일상이 됩니다. 내어줌으로 만족감을 얻는 것이 요조의 소통 방법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요조는 자신과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거짓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같은 학우 '다케이치'는 요조의 거짓을 간파합니다. 
"일부러 그랬지?"
그 순간 요조는 비로소 자신을 객관화했을 것입니다. 요조의 마음 깊은 곳 괴리감으로부터 움트고 있는 균열을 보았을 것입니다. 괴리는 무(無)가 아니었습니다. 상실이었고 파괴였으며 멸망이었습니다. 요조는 다시 세상이 무서워집니다. 사람이 무서웠고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술, 담배, 여자라는 도피처를 선택합니다. 스스로를 무(無)라 부르며 그 텅 빈 공간에 술, 담배, 여자를 채워갑니다.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요조가 선택한 도피는 눈을 잠시 감는 것일 뿐 대상을 치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 할 언젠가의 시간 동안 두려움만 커져갈 뿐입니다. 요조는 서서히 망가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요조를 사랑하고 예뻐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요조를 도와주고 사랑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요조를 망친 또 하나의 요인이지 않았을까요. 텅 비어있는 컵이라면 물이나 다른 것으로 채워야 했는데 그는 스스로 채우지 못하고 텅 빈 잔을 남이 채워주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조는 동반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같이 자살을 선택한 여자는 죽고 요조는 살아남습니다. 이제 요조는 무(無)에서 망(亡)으로 기웁니다. 움트고 있는 균열은 요조를 본격적으로 망가뜨립니다.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자신의 처지를 의탁하며 하루하루 술로 보냅니다. 그리고 결국 약에 손을 대고야 맙니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스무일곱 살, 요조의 나이였습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실격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던 여린 심성의 한 젊은이가 인간들의 위선과 잔인함에 의해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1948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요절하여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남긴 일본 현대 문학의 대표적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다.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을 통해 현대 사회를 예리한 고발하고 있다. 함께 실린 '직소'에서는 유다의 인간적인 측면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새로이 조명하고 있다.
저자
다자이 오사무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2.04.10

 

▣ 소설 <인간실격> 서평 : 요조의 불행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소설 <인간실격>은 첫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조의 독백으로 전개됩니다. 요조의 내면 갈등과 고뇌,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자세하게 서술되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그가 어떻게 파괴되고 와해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조는 자신의 불행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항의할 수 없는, 온전히 자신이 저지른 자신의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조의 불행은 정말 요조의 죄 때문일까요.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 요조의 이타성

요조는 이타적 인물입니다. 이타성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것"입니다. 요조는 자신의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타인의 행복을 이해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나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과 비례했고 나의 행복의 원인은 타인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요조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기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타성은 결코 요조의 죄가 아니고 불행의 원인도 아니며 없애야 할 가치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조는 왜 이타성이라는 성품에 의해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소설 중반 요조와 그의 친구 호리카가 반의어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 단어로 반의어 놀이를 하는데 그중, 주목하고 싶은 단어는 '죄'입니다. 

요조: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호리카: 법이지
요조: 죄라는 건, 자네! 그런 게 아니야. 
요조: 이 테마 하나에 대한 대답만으로도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호리카: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요조: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호리카: 악과 죄는 다른가?
요조: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호리카는 죄의 반의어를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조는 호리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냅니다. 호리카가 죄의 반의어를 '선'이라고 말하자 요조는 '선'은 '악'의 반의어라고 반박합니다. 요조의 말대로 이 대화를 통해 대답만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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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는 죄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의 범위를 법적 처벌 대상으로 한정 짓지 않습니다. 저울 왼편에 죄를 달고 오른편에 법을 단다면 저울은 왼편으로 기우는 것이 요조가 생각하는 죄와 법의 무게 차이입니다. 법의 지배 밖에 있는 영역은 죄가 될 수 없는가? 명시적으로 표기하지 않은 죄는 죄가 될 수 없는가? 법이 지배할 수 없는 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죄는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요조의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요조에게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죄의 범위 안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불행에 그렇게 아파했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요조는 '죄'의 반의어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조는 평생을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의 행복마저 죄의 일부로 여기며 차라리 누군가 나를 죽이는 것이 그 사람에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를 원했고 죄를 씻어내는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죄는 스스로 참회할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벌'은 아닙니다. 벌은 명확하게 타인에 의해 정죄되고 참회되는 개념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으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죄를 씻지 못한 요조는 스스로 삶을 끊어서라도 세상이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스스로를 내버려 둔 게 아니었을까요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 요조의 세계관

요조가 생각하는 죄의 범위는 넓었고 무게는 무거웠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씻어내야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조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합니다. 요조는 어린 시절 '공복'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만 하는 괴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밥을 먹는 행위마저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였습니다. 배고픔이란 먹는 행위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닌 일시적 해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원한 괴로움 속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영원한 불행 속에 있는 것이고 불행을 씻어내고 싶은 사람 들고 가득 한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죄와 불행을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요조에게 세상은 죄로 가득했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는 계속해서 죄를 씻어내는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조가 피부로 느낀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짓말과 위선,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이었고 사람들은 죄를 씻어내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 소설 <인간실격> 서평 : 요조가 자멸한 진짜 이유

 
죄를 씻어내기 원하는 요조와 죄와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타성'입니다. 요조는 이타성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은 이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요조는 이타성에 의해 자멸하였으니 세상의 이기심으로 무너졌다고 설명해도 옳을 것 같습니다. 
 
요조가 스스로의 이타성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타성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면 어땠을까요. 누군가도 요조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내놓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식사를 통해 배고픔이라는 영원한 괴로움을 없앨 수는 없지만 만족감과 기쁨을 주는 행위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속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기도 한다고, 사랑받는 것은 불안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해 줬더라면 요조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나의 행복을 정의 내리기 위해 남의 행복도 정의 내려야 하는 것. 이타성. 요조가 바랐던 이타성으로 가득한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생각해 봅니다. 상대방의 이타성은 내가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가 아닙니다. 이타성은 자기희생이 필수적으로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게 베푼 이타성은 누군가 날 위해 자기희생을 한 결과입니다. 
 
이타성이 상실돼버린 지금, 이타성과 희생이 경제적으로만 환산되어 평가 절하되고 있는 지금, 요조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내 주변에 있을 요조에게, 그가 베푼 호의를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지나가버리진 않았는지 그가 지닌 이타성을 이용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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